맨위로가기

대연각호텔 화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연각호텔 화재는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참사 중 하나이다. 1969년에 완공된 22층 규모의 대연각호텔 1층 커피숍에서 LP가스 폭발로 시작된 불은 가연성 내벽을 타고 급속도로 번져, 건물 전체를 덮쳤다. 당시 소방 장비의 한계와 부실한 건물 구조로 인해 163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부상당했으며, 9.11 테러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건물 화재 참사로 기록되었다. 사건 이후 건물은 리모델링되어 '고려대연각타워'로 변경되었으며, 2010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안전 불감증을 일깨우고, 건축 및 소방 관련 법규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호텔 화재 - 후쿠야마 호텔 화재
    2012년 후쿠야마 호텔 화재는 부실한 안전 관리, 불법 증축, 미흡한 소방 대응으로 투숙객 7명이 사망하고 호텔이 전소된 사건으로, 일본 숙박 시설 안전 점검 강화 및 법률 재검토를 촉발했다.
  • 호텔 화재 - 2018년 하얼빈 호텔 화재
    2018년 8월 25일 새벽 하얼빈 국제 호텔 가라오케 바 주방에서 발생한 화재로 22명이 사망하고 투숙객들이 대피했으며, 중국 당국은 조사팀 파견, 법적 대리인 구금, 안전 점검 실시, 카메라 훼손 용의자 체포 등의 조치를 취했다.
  • 1971년 12월 - 스미소니언 협정
    스미소니언 협정은 1971년 미국 달러의 금 태환 중단 이후 10개국 그룹이 체결한 국제 통화 협정으로, 달러 가치 평가절하, 환율 변동폭 확대, 주요 통화의 달러 대비 절상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으나 1973년 변동환율제로 전환되며 붕괴되었다.
  • 1971년 12월 -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결과로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벌어져 파키스탄의 항복과 방글라데시 독립을 가져왔고 남아시아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온 전쟁이다.
대연각호텔 화재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사건 이름대연각호텔 화재
다른 이름대연각호텔 대화재 사고
발생 날짜1971년 12월 25일
발생 시간오전 9시 50분
발생 장소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원인액화석유가스 폭발
최초 보고자서울중부소방서
결과건물의 전소
피해 정보
사망자191명
부상자63명
재산 피해8억 3,820만원 (현재 가치 192억 5천만원)
사진
1971년 12월 서울특별시 중구 대연각호텔 대화재 사고

2. 사건 발생 이전

대연각호텔은 일제강점기 5대 백화점 중 하나였던 평화백화점(平田百貨店) 터에 세워진 고급 호텔이었다.[8] 명동남대문시장 중간 충무로(일제강점기 본정(本町))에 위치했으며,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인접해 있었다. 1967년 극동건설(極東建設)에 의해 착공되어 1969년에 준공되었으며, 24층(지상 22층, 지하 2층) 높이 82.2m, 연면적 19304m2 규모였다.[9] 극동건설 회장 김용산(金用山)이 직접 호텔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대연각호텔은 222개의 객실을 갖춘, 당시 기준으로 고급 호텔이었으나,[1] 건물 설계는 화재에 취약했다. 두 개의 내부 계단은 비상구가 아닌 엘리베이터 고장 시 사용 목적이었고, 내화문도 없었다. 이 때문에 화재 발생 시 계단은 굴뚝 역할을 하여 불길이 상층부로 번지는 원인이 되었다.[3][4] 건물 외부에는 비상 계단이 없었고, 객실 사이 벽의 내화성이 부족하여 화재 확산을 가속화했다.[3] 또한, 배터리 작동식 비상등을 포함한 여러 안전 기능이 부족했다.

2. 1. 대연각호텔 건립 배경

대연각호텔은 일제강점기 5대 백화점 중 하나였던 평화백화점(平田百貨店) 터에 세워진 고급 호텔이었다.[8] 명동남대문시장 중간 충무로(일제강점기 본정(本町))에 위치했으며,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인접해 있었다.

1967년 극동건설(極東建設)에 의해 착공되어 1969년에 준공되었으며, 24층(지상 22층, 지하 2층) 높이 82.2m, 연면적 19304m2 규모였다.[9] 극동건설 회장 김용산(金用山)이 직접 호텔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2. 2. 건물 구조 및 안전 문제

1969년에 완공된 22층 높이의 대연각호텔은 당시 기준으로 고급 호텔이었다.[3] 객실은 222개였다.[1]

건물 설계는 높은 사망자 수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있다. 두 개의 내부 계단은 엘리베이터 고장 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지 비상구로 설계된 것이 아니었으며, 내화문도 없었다. 그 결과 화재 당시 계단은 연기가 가득 차 굴뚝 역할을 하며 불길이 건물 상층부로 번지게 했다.[3][4] 건물에는 외부 비상 계단이 없었다. 호텔 객실 사이의 벽은 내화성이 충분하지 않아 화재 확산을 가속화했다.[3] 또한, 건물에는 배터리 작동식 비상등을 포함한 많은 안전 기능이 부족했다.

3. 사건 경위

사고 조사 결과, 대연각 호텔 1층 커피숍에서 LP가스가 폭발한 것이 화재의 원인으로 밝혀졌다. 건물에는 비상계단이 몇 개 없었고 옥상 출입문마저 닫혀 있어, 23구의 시신이 옥상 출입문 앞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 호텔에는 위셴룽 주한 대만 공사와 파질 유즈바시오글루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무관(대령) 등 귀빈들도 투숙하고 있었다. 특히 11층에 묵고 있던 위 공사는 화재 발생 10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위 공사를 구조하던 소방관들은 전원 1계급 특진했다. 그러나 위셴룽 공사는 기도에 심한 화상을 입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다가 화재 발생 열흘 만인 1972년 1월 4일 세상을 떠났고, 유즈바시오글루 대령도 화재 당일 사망했다. 이 둘은 사망 후 1972년 수교훈장 흥인장과 보국훈장 청수장을 각각 추서받았다.

사고는 크리스마스 당일에 발생했으며, 파티 때문에 많은 투숙객이 머물고 있었다.[10]

3. 1. 화재 발생 및 확산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 오전 9시 50분경, 호텔 1층 커피숍에서 LP가스가 폭발하면서 화재가 발생했다.[10] 가연성 내벽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약 1시간 만에 21층 건물 전체로 화재가 확산되었다. 화재는 2층 커피숍에서 조리용 연료로 사용되던 프로판 가스 폭발이 원인으로 알려졌다.[2]

호텔 주변에는 5층 정도 높이의 낮은 건물들이 인접해 있어, 하층부에 있던 사람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인근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거나 커튼이나 시트 등을 찢어 밧줄을 만들어 탈출을 시도했다. 8층에서 시트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린 여성은 다행히 발목 부상만으로 기적적으로 생존했지만, 뛰어내린 사람들 중에는 사망자가 더 많았다.

3. 2. 구조 및 진화 작업

신고를 받고 서울중부소방서가 출동하여 당시 국내 최고 높이였던 32m 사다리차를 이용해 진화에 나섰지만, 사다리차는 7층까지 밖에 닿지 않았다.[14] 소방대의 사다리가 8층까지만 닿아 9층부터 22층에 있던 사람들은 갇히게 되었다.[4]

미군 기지 소속 헬기를 포함한 12대의 헬기가 동원되어 옥상에 있는 투숙객들을 구조하려고 했다.[4][2] 호텔 주변에는 5층 정도 높이의 낮은 건물들이 인접해 있어, 하층부에 있던 사람들은 인근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거나, 커튼이나 시트 등을 찢어 밧줄을 만들어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8층에서 시트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린 여성은 발목 부상만으로 생존했지만, 뛰어내린 사람들 중에는 사망자가 더 많았다.

4. 피해 상황

대연각호텔 화재로 총 163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부상을 당해,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사망자 중에는 주한 대만 대사관 참사관,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무관 등 외국인도 있었다.[4]

4. 1. 인명 피해

총 163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부상을 당해,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불길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려 사망한 사람은 최소 38명이었으며, 헬기에서 추락하여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4] 사망자 중에는 위셴룽 주한 대만 대사관 참사관, 파질 유즈바시오글루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 무관(대령) 등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셴룽 참사관은 화재 발생 10시간 만에 구조되었으나, 기도에 심한 화상을 입고 1972년 1월 4일 사망했다.[5] 유즈바시오글루 대령은 화재 당일 사망했다. 이들은 사망 후 각각 수교훈장 흥인장과 보국훈장 청수장을 추서받았다.

5. 사건 이후

대연각호텔은 1973년에 '''빅토리아호텔'''로 개칭되어 영업을 재개하였고, 1974년 12월 대연각관광에 인수되었다. 이후 '''고려대연각타워'''로 개칭되어 오피스빌딩으로 사용되었다. 대연각관광은 1982년 고려통상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고려통상그룹을 형성하였으며, 회장 이강학은 전직 경찰청장이다.[11]

IMF 경제 위기로 고려증권 등 자회사가 경영 파탄을 겪으며 그룹은 해체되었으나, 고려통상은 동광제약과의 순환출자로 건물 소유를 유지하고 있다.[11]

2010년 2월 27일, 같은 건물 옥상 냉각탑에서 다시 화재가 발생했으나, 소방차 출동으로 14분 만에 진화되었다.[12]

5. 1. 법적 처벌

당국은 이 재난과 관련하여 호텔 소유주 김용산을 포함한 호텔 관계자 4명(부주의와 부실 공사 혐의), 전 시청 관계자 2명, 과실 혐의로 기소된 소방관 1명 등 총 8명을 체포했다.[6][1]

5. 2. 건물 재개장

사고 4년 후인 1975년, 전직 경찰청장 이강학이 이끄는 해외 산업이 빅토리아 호텔을 인수했다. 11층 이상은 사무실 용도로 변경하는 등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건물명을 '고려대연각타워'로 변경하고 재개장했다.[11] IMF 경제 위기로 고려통상그룹은 해체되었으나, 고려통상은 자회사였던 동광제약과의 순환출자를 통해 건물 소유를 유지하고 있다.[11]

5. 3. 추가 화재 발생

화재 이후 건물은 개조되었다. 1973년에 개수하여 '''빅토리아호텔'''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다시 시작했으며, 1974년 12월 대연각관광에 인수되었다. 이후 '''고려대연각타워'''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오피스빌딩이 되었다. 대연각관광은 1982년 이후 고려통상으로 회사 이름을 변경하고 고려통상그룹을 형성하였다. 회장인 이강학은 전직 경찰청장이다.

IMF 경제 위기로 고려증권 등 자회사의 경영이 파탄나면서 그룹 자체는 해체되었으나, 고려통상은 자회사였던 동광제약과의 순환출자로 빌딩 소유를 유지하고 있다.[11]

이 사고와는 별개로, 2010년 2월 27일 같은 건물 옥상의 냉각탑에서 다시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소방차가 출동하여 14분 만에 진화되었다.[12]

6. 사회적 영향 및 평가

대연각호텔 화재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안전 의식과 소방 시스템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 화재는 1972년 서울시민회관 화재,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사고와 함께 서울 3대 화재 사고이자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로 기록되었으며, 9.11 테러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건물 화재 참사였다.[6][7] 이 사건으로 한국 사회 전반의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고, 건축법 및 소방 관련 법규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월 1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화재 원인이 건물의 부주의한 화재 관리 및 건축 자재에 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이후 조사 과정에서 호텔 측의 안전 불감증, 부실 공사, 소방 당국의 미흡한 대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인재(人災)였음이 드러났다. 특히 소방 장비 부족과 초기 대응 실패는 정부의 재난 대응 시스템에 대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6. 1. 안전 의식 강화

대연각호텔 화재는 1972년 서울시민회관 화재,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사고와 함께 서울 3대 화재 사고이자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로 기록되었으며, 9.11 테러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건물 화재 참사였다.[6][7] 이 사건은 한국 사회 전반의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건축법 및 소방 관련 법규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2. 정부 대응 비판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월 1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화재 원인이 건물의 부주의한 화재 관리 및 건축 자재에 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이후 조사 과정에서 호텔 측의 안전 불감증, 부실 공사, 소방 당국의 미흡한 대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인재(人災)였음이 드러났다. 특히 소방 장비 부족과 초기 대응 실패는 정부의 재난 대응 시스템에 대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7. 관련 미디어

SBS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2024년 5월 2일에 〈1971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 - 16시간의 사투, 옥상 위의 헬기〉 편이 방송되었다.[1]

참조

[1] 뉴스 Seoul hotel fire: 8 arrested South China Morning Post 1971-12-29
[2] 웹사이트 141 DIE IN SEOUL AS HOTEL BURNS https://www.nytimes.[...] 1971-12-26
[3] 뉴스 Insufficient fire exits pushed up hotel deaths South China Morning Post 1971-12-30
[4] 뉴스 Fire turned hotel into death-trap chimney expert South China Morning Post 1971-12-28
[5] 뉴스 Hotel fire toll up South China Morning Post 1972-01-05
[6] 뉴스 Fire experts off to Seoul South China Morning Post 1972-01-11
[7] 서적 Disaster Risk Management in the Republic of Korea Springer Singapore
[8] 뉴스 [大韓民国第1号]デパート(''[대한민국 제1호] 백화점'') http://news.chosun.c[...] 朝鮮日報 2010-08-27
[9] 웹사이트 高層建築物(マンション)消火対策 https://webcache.goo[...] 弘農119安全センター 2016-06-13
[10] 웹사이트 大然閣ホテル火災事故 http://www.archives.[...] 国家記録院 2016-06-13
[11] 뉴스 火魔の傷痕か...武器水西財閥で「グループ解体」(''화마의 상흔인가…무기수서 재벌로 ‘그룹해체’'') http://m.skyedaily.c[...] スカイデイリー 2010-08-27
[12] 뉴스 '그때 그 곳', 대연각 빌딩서 화재(종합) http://www.cbs.co.kr[...] 노컷뉴스 2010-02-27
[13] 문서 실종된 25명 사망 처리
[14] 뉴스 '그때 그 곳', 대연각 빌딩서 화재(종합) http://www.cbs.co.kr[...] 노컷뉴스 2010-02-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